일러두기
이 글은 만약 신지가 여자고 아스카가 남자였다면? 이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한 2차 창작입니다. 종교(일본신도, 기독교)・폭언・상호 동의가 불확실한 신체접촉・유혈 묘사가 있습니다. 원작 분위기와 캐릭터 성격, 캐릭터 사이 관계성을 살리기 위한 장치로 봐 주세요.
TV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중 25화 <Air> 전반부를 배경으로 합니다.
12월 31일.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이 날을 오미소카라고 부르며 다가오는 새해를 기다리고 축복한다. 그리고 새해 첫날, 오쇼가쓰에는 앞다투어 동네 신사에 가 참배하고 소원을 빈다. 나도 올해 초, 제3신도쿄시로 오기 전 동네의 신사에서 소원을 빌었다. 아빠와 친구들이 날 사랑하게 해 주세요. 뭐가 되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고, 더 이상의 재난은 싫어요. 그저 평화롭게 살고 싶어요. 하지만 내 소원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빠와 친구들은 날 사랑하는 것 같다가도 멀어져 버렸고, 재난은 끝도 없이 일어나고, 내가 사는 곳은 생지옥이 되어 버렸다. 그 신사의 신은 이미 오래 전 그곳을 떠났거나, 사람들의 눈물 어린 기도를 듣다가 자기마저 슬픔과 분노에 잠겨 힘을 잃어버린 것이 틀림없다. 꼭 지금의 나처럼.
카오루가 죽은, 아니 내가 카오루를 죽인 지도 벌써 한 주가 되었다. 얄궂게도 그 아이를 죽인 다음날이 몇천 년 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의 생일이었다. 그 사람은 살아 있을 때부터 죽었다 살아나 신이 된 지금까지, 세상에 잠깐 머물다 간 수많은 영혼들을 구했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카오루가 나의 영혼을 구했느냐고 한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 그 아이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카오루를 만났을 때부터 남들을 만날 때 느끼던 미묘한 어색함이나 거리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난 너를 만나기 위해 태어난 걸지도 몰라. 그 아이는 이렇게 말했었다. 어쩌면 나도 그 아이를 만나기 위해 태어난 것일지도 몰랐다. 카오루는 내가 아무리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해도 끝까지 진지하게 들어 주었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바라는지 끊임없이 알고 싶어했다. 그리고 언제나 흐뭇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봐 주었다.
카오루의 손길에는 다른 사람과 몸이 닿을 때마다 턱턱 차오르던 뜨겁고도 싸늘한 위협이 없었다. 오히려 가슴이 벅차서 눈물이 맺힐 만큼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 아이의 품에 안길 때마다 아기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마구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엄마와 아빠도 내가 태어났을 때,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나를 이렇게 안아 주었을까? 너처럼 나한테 쉴새없이 입을 맞추고 따뜻한 말을 해 주었을까? 나는 몇 번이고 그런 질문을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카오루는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분명 그랬을 거라고, 세상에 자기 자식에게 그러지 않는 부모는 없다고 다정하게 말해 주었다. 정말? 부모들은 다 그런다고? 카오루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아빠는 엄마가 죽은 뒤로 나에게 항상 차갑게 대했고, 선생님은 그저 내 보호자일 뿐이었는데.
지금까지 만났던 그 어느 누구와의 사이에서도, 나는 사랑을 알지 못했다. 엄마는 기억에 없고, 아빠와 선생님은 항상 멀게만 느껴진다. 미사토 언니는 아빠보다 나를 아끼지만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고, 아스카는 내가 싫어하는 짓만 하면서 심술을 부리고 화를 내 나를 힘들게 했다. 게다가 셋은 머릿속에 더러운 생각만 가득 차 있다. 아스카는 말할 필요도 없고, 미사토 언니는 레이가 자폭하고 나서 끔찍한 방법으로 나를 위로하려 했다. 아빠는 초호기 안에 엄마가 새파랗게 살아 있는데도 리츠코 박사님과 역겨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다들 나를 위하고 걱정한다고 하지만, 결국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자기 생각뿐이다. 카오루와 다르게.
미사토 언니가 아무리 나를 위로한들, 나 때문에 자기가 더 힘들어지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다. 카지 아저씨가 죽고 아스카가 망가진 상황에 나까지 엉망이 된다면 언니로서는 비참하기 그지없겠지. 그 애가 스스로 죽음을 택해서 어쩔 수 없다니, 당신들이 나한테 그 애를 죽이라고 명령한 거잖아. 성스러운 밤에 부러지고 짓이겨진 건 그 아이의 목만이 아니었다. 카오루는 내 영혼을 구해 밝은 빛을 쪼이려다가 다시 진창에 처박아 버렸다. 물론 그 아이는 죄가 없다. 수천 년 전 세상을 혼란스럽게 했다는 죄명을 받은 그 사람과 마찬가지로. 잘못한 건 남들이다. 나에게 카오루를 죽이라고 명령한 미사토 소령님, 리츠코 박사님, 프라이드를 한껏 과시하다 허망하게 무너져 버린 아스카, 속을 알 수 없는 레이, 그리고 이 모든 시련을 안겨 준 아빠.
정오다. 햇볕이 따가웠다. 도로 위 아스팔트가 달아올라 아지랑이가 이글거렸다. 15년 전 남극에서의 폭발로 자전축이 뒤틀린 이후, 이 땅에 찾아오는 계절은 보이지 않는 물 속을 헤엄치는 듯 습한 여름뿐이었다. 예전에는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와 나뭇잎이 마르고, 겨울이 오면 모든 것이 얼어붙고, 그러다 따뜻한 봄이 오면 온 세상이 다시 깨어났다고 했다. 사람이 매일 잠자고 일어나는 것처럼 사계절이 돌고 돌았다고. 그래, 이것도 겨울을 맞아 잠든 내가 꾸는 꿈일지도 몰라. 어쩌면 진짜 나는 선생님 댁에서 세상 모르고 자면서, 뉴스에서나 보던 네르프에 들어와 괴물과 싸우는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문득, 이 꿈에서 깨야 한다는 충동이 들었다. 볼을 세게 꼬집었다. 아프다. 손가락을 손등 쪽으로 꺾었다. 어느 정도 휜 이후로는 휘어지지 않고 아프기만 했다. 눈꺼풀이 욱신거리도록 눈을 꼭 감았다. 눈을 뜨면 나는 아늑한 내 침대에 누워 있을 거고, 선생님이 토스트를 구워 놓고 날 깨우고 있을 거야. 눈이 시리도록 눈을 크게 떴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뙤약볕이 내리쬐고, 땅에서는 열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이 땅에 겨울이 오지 않듯 나도 잠들어 꿈을 꾸는 게 아니었다. 내 정신은 너무도 또렷해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아야 했다. 꿈에서 깬 뒤 닥쳐오는 현실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아스카. 내가 남에게 바라는 것 중 그 어느 것도 이루어 주지 않는 사람. 남에 대한 배려 따위 모르는 뺀질뺀질한 녀석. 아스카? 그래, 아스카, 소류 아스카 랭글리! 그 아이를 찾아야 내가 깨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아스카가 입원한 네르프 부속병원의 병실을 향해 내달렸다.
아스카! 병실 문을 열어젖히고 크게 외쳤다. 아스카는 쇠 프레임이 뼈처럼 앙상한 침대에 마네킹처럼 누워 있었다. 두 눈은 힘없이 감겨 있었다. 침대를 요새처럼 둘러싼 의료기기가 내는 건조한 전자음만이 그 아이가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나는 아스카 앞에 주저앉았다.
“아스카, 아스카, 여기 봐, 눈 좀 떠봐. 나야, 나 신이야! 왜 그렇게 나를 피하는 거야? 내가 싫어? 응, 싫겠지, 난 다른 애들은 거칠게 대하면서 미사토 언니 앞에서만 의젓하게 구는 네 마음도 몰랐고, 새엄마랑 통화하는 네 심정도 몰랐고, 네가 사도한테 정신공격을 당할 때 난 아무것도 못했고, 엉망이 된 널 위로하지도 않았으니까……. 나 정말 최악이지, 응? 그래도 한 번만 눈을 떠줘 아스카, 뻔뻔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나 지금 네가 필요해!”
나는 보채다 못해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목소리는 갈라지기 시작했고, 어느샌가 두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볼을 타고 입안으로 들어온 몇 방울은 쓰디썼다. 내가 축축한 얼굴을 부비는 걸 느꼈는지, 아스카의 팔이 순간 움찔했다. 그리고 천천히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땀에 젖은 속눈썹 사이로 푸른 눈동자가 비쳤다.
“뭐야, 바보 신이잖아…….”
아스카가 팔을 받치고 몸을 일으키다가 윽 소리를 내며 다시 드러누웠다. 오랫동안 누워 있어서 몸이 약해진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바닥에서 일어나 두 손을 내밀었다.
“내, 내 손 잡아. 일으켜 줄게.”
아스카는 얼굴을 찡그리고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들어올렸다. 내 손으로 그 애 손목을 감싸듯 잡고 반동을 주면서 조금씩 당겼다. 그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는지, 내가 평소에 밀어도 꿈쩍하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던 몸이 종잇장처럼 가볍게 들렸다. 눈에는 여전히 생기가 없었고 입술은 핏기 없이 허옇게 부르터 있었지만, 입매는 희미하게 올라가 있었다. 평소처럼 은근한 비웃음을 띠고 있는 것이 딱 그 아이다웠다.
“나보다 운동도 못하는 바보한테 잡혀서 일어나기나 하고. 역시 영웅의 조건은 정신력이야. 진정한 일류 파일럿은 내가 아니라 온갖 전투에서 끝까지 버티고 살아남은 신, 너지. 사도와의 싸움 때문에 친구가 크게 다치고 살던 동네가 폭발 한방에 날아가 모두 피난을 가 버려도, 절대 안 무너져……. 나랑은 다르게.”
아스카는 기분이 안 좋을수록 남을 지나치게 추켜세우는 버릇이 있다. 그 말들은 전혀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다.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주변 사람 기분만 더 나빠질 뿐인데. 그리고 지금 뒤에 한 말은 누가 들어도 나를 향한 비난이다. 소중한 사람들이 네 곁에서 사라지는데도 무정하기 짝이 없다고, 너도 네 아버지나 퍼스트와 똑같다고. 아스카와 이야기할 때는 늘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야 이런 식으로만 이야기하니까.
“그런 말 하지 마. 나도 너만큼, 아니 너보다 더 힘들었어. 네가 입원한 뒤로 레이가 사도와 싸우다 자폭했어. 난 한동안 그 애가 죽은 줄만 알았고, 우연히 만난 정말 멋진 애를 내 손으로 죽여야 했어. 인간으로 변장한 사도였거든. 미사토 언니는 그 애가 죽고 싶어서 죽었다고 하지만, 결국 죽인 사람은 나잖아. 나는 남들이 죽는 것도 못 막은 나쁜 애야.”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내 이야기를 듣던 아스카가 정말 멋진 애, 라는 부분에서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그 애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졌다. 갑자기 내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아스카가 내 블라우스 깃을 잡고 끌어당긴 것 같았다. 잔뜩 흥분한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찼다.
“신, 그 ‘멋진 애’가, 미사토 누나가 말했던 타브리스인가 카오루인가 하는 그놈 맞지? 약 맞고 정신없을 때 대충 들어서 잘은 모르는데, 그놈이 잘도 정체를 속여서 피프스 칠드런이 됐고, 너는 그 사기꾼을 꽤나 좋아했던 모양이더라? 죽고 싶어 안달난 애한테 반하는 것보다 멍청한 짓거리가 어디 있어? 그리고 타브리스는 사도야. 나를 이따위로 만들어 놓은 놈처럼, 우리의 적이라고. 그 자식은 네 손에 죽으면서 지 평생 소원만 다 이루고 간 거야. 너는 너대로 그놈한테 졌고! 야, 신, 너는 왜 그딴 자식을 좋아하고 난리야, 사람 짜증나게!”
아스카는 목에 핏대를 잔뜩 세워가며 나에게 고함을 쳤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쨍한 눈동자가 이글거린다.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으로 내 몸도 벌벌 떨리고 있었다. 숨이 가빠진다. 아스카 너야말로 나를 하나도 모르잖아! 그 애는 너랑 달라. 누구한테나 친절하고, 이해심이 많고, 언제나 남을 생각하면서 말해. 너처럼 이렇게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면서 소리치지도 않고 사람 불편하게 하는 말도 안 해! 죽고 싶어 안달난 애라니, 역시 더 바보인 사람은 아스카 너야. 그 정도밖에 생각을 못하는구나. 그 애가 정말 죽고 싶었겠어? 어쩌다 운이 나빠서, 죽어야 마땅한 존재로 잘못 태어났을 뿐이야.
오히려 우리의 진짜 적은 카오루가 아니라, 그 애를 죽이라고 나한테 명령한 어른들이라고! 우리가 정말 에바에 타고 싶어서 파일럿이 된 것 같아? 어른들 때문에 힘들고 하기 싫어도, 당장 죽는 게 더 싫으니까 억지로 하는 거야!
하지만 이 수많은 말들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그리 거창하지 않다.
“그, 그게 아스카 너랑 무슨 상관인데! 너랑 카오루는 한 번도 만난 적 없으면서, 왜 그 애 한테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이 몇 마디조차 아스카처럼 또렷하고 날카롭게 내뱉지 못한다. 내 입술과 혀와 목청은 학예회 무대 위에서처럼 잔뜩 굳어 삐걱댄다. 그저 말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만을 뱉을 뿐이다. 또다시 눈물이 차오른다. 이래서야 아스카를 당해낼 수가 없다. 아니나다를까 내 말을 들은 아스카가 어이없다는 듯 크게 웃었다. 꼭 영화에 나오는 악당 같다.
“몰라서 묻냐? 그 자식은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들어. 삶에 미련도 없고, 남들을 딱하게 여기고. 그러니까 모두한테 무조건 친절하게 대하고. 그게 사람이 할 짓이냐? 아주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인간의 자리를 뺏으러 온 괴물 주제에.”
그렇게 악악대던 아스카는 내 옷깃을 쥔 손에서 힘을 빼고 영어로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침대에 다시 드러누웠다. 그 반동으로 나도 아스카 위에 엎어졌다. 윗옷 단추가 풀려 있었는지 훤히 드러난 맨살에서 땀 냄새가 훅 끼쳤다. 쌕쌕대는 숨소리 사이로 터질 듯이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가슴에 붙은 심전도계 전극이 옷 너머로 살을 눌렀다. 오키나와로 수학여행을 못 간 날, 실내 수영장에서 숙제를 할 때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그 애의 하얗고 붉은 몸에 지금 얼굴을 묻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자기 할 말만 하는 이기적인 녀석과 이렇게나 가까이 붙어 있다니. 내가 꿈꾸고 있지 않다는 건 너무도 잘 알았다. 여기를 떠나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애는 내 머리를 꽉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나뭇가지 같은 팔에서 그런 힘이 나오다니.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안 돼, 가지 마.”
아스카가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숨이 거친 건 아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맹렬하게 타오르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다. 손가락이 천천히 머리카락 틈새로 들어왔다. 머리가 붕 뜬 것처럼 어지러웠다. 머리카락이 헤집어질 때마다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너도 타브리스처럼 사라질 거야? 모든 걸 버리고?”
아스카답지 않은 질문은 나를 더욱 당황스럽게 했다. 무슨 말이야 그게, 라고 내가 되물었지만 그 애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무언가를 참는 것 같은 표정으로,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내 등을 받치고 옆으로 돌아누웠을 뿐이다. 아스카는 찢어져 피가 맺힌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
“그딴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마. 네가 내 게 될 수 없다면…… 난 아무것도 필요 없어.”
그러고서는 나를 두 팔로 껴안았다.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 애에게 입을 맞추었다. 놀란 아스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곧 지그시 감았다. 미사토 언니가 집을 비운 날 밤 아무렇게나 입술을 부딪쳤던 것과는 달랐다. 그때보다 끈질기고 집요했다. 피 맛이 났다. 머리가 아까보다 더 어지러웠다. 눈을 감으면 눈꺼풀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한참 만에 입술을 뗀 아스카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내 목덜미에 파고들었다. 큼지막한 손이 등을 쓸어내릴 때마다 몸이 달아올랐다. 어느새 나도 두 팔로 그 애의 등을 단단히 끌어안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카오루와 했던 것보다 더한 짓을, 내가 가장 싫어하는 아스카와 하고 있었다. 그 애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벗어나기 싫었다. 이대로 계속 있고 싶으면서도 더한 걸 하고 싶었다. 친절하게 문을 두드려 열어 달라고 부탁하든, 우악스럽게 발로 걷어차며 협박하든, 일단 내 마음의 문을 열어젖히기만 하면 상대가 누구든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나도 내가 더럽다고 생각했던 미사토 언니와 별로 다를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가다가는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본 풍경처럼 나와 아스카가 뒤엉켜 있을 게 뻔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쾌감이 치밀었다. 머리에 찬물을 맞은 듯 번쩍 정신이 들었다. 내가 등을 부둥켜안고 있던 손에 힘을 풀자, 아스카가 하던 것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은 풀려 있고 얼굴과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내가 알던 아스카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 모습에 또 두려움과 혐오감이 엄습했다. 분노에 차 소리칠 때보다, 생판 남을 보는 것 같은 지금이 더 끔찍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날카롭고 저릿한 느낌이 등을 훑고 지나갔다.
“싫어!”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아스카를 밀쳐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발이 닿자 땀에 젖은 옷에 에어컨 바람이 스쳤다. 서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아니, 그렇다고만 하기에는 추웠다.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정신을 차린 아스카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텅 빈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도에게 정신공격을 받은 직후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야,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그러더니 흉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짐승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아까 화낸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정신이라는 것이 영영 사라진 것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다가 괴성을 지르기를 반복했다. 아스카의 비명은 일본어뿐만이 아니라 영어와 독일어까지 뒤섞여 이해가 거의 불가능했지만, 이 말만은 귀에 선명히 꽂혔다.
“How dare, how dare you treat me like that! 어떻게 너 따위가, 나한테 감히!”
아스카가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눈을 찢어지게 뜨고 이를 드러낸 채 나에게 달려들었다. 가슴에 붙인 심전도계 전극이 몇 개 떨어져 나갔다. 손등에 꽂혀 있던 링거도 빠져 버렸다. 갈 곳을 잃은 주사액이 호스에서 새나왔다. 손등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 아스카가 양손을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둔탁한 충격과 함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입안에서 피 맛이 났다. 얼굴에도 핏방울이 튀었다. 나는 아스카를 피하며 뒷걸음치다 간신히 호출 버튼을 눌렀다. 간호사들과 의사가 급히 달려왔다. 덩치 큰 간호사가 아스카를 제압해 침대에 눕히자, 나머지 간호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다시 진정제 주사를 놓았다. 눈을 부릅뜨고 끅끅대던 아스카가 곧 조용해졌다. 팔다리는 축 늘어졌지만, 두 볼은 여전히 붉었다.
"이카리, 괜찮아? 방금 소류가 널 때린 것 같은데, 크게 다치지는 않았니? 얘가 이러는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어. 대체 왜 그러는 거지? 너 혹시 아니?"
젊은 의사가 나를 살피며 물었다. 그러나 나는 감사 인사는커녕 고개만 까딱하고 도망쳤다. 사실은 진짜 이유를 알려 주고 싶었지만, 어차피 진실을 말해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내가 겁쟁이라는 게 알려지는 것은 더 싫었다.
나는 웃다가 울다가 하며 목적지도 모른 채 무작정 앞으로 달렸다. 내가 싫어했던 사람들 모두와 내가 닮아 있었다. 나는 아빠처럼 무정하고, 미사토 언니처럼 더럽고, 아스카처럼 제멋대로다. 이러니 모두들 나를 떠난 것이다. 이런 나를 아무도 좋아할 리가 없다. 최악이다. 거칠게 숨을 쉬며 내달리는 뒤로 날카로운 공습경보가 울렸다. 전략자위대가 네르프를 습격했다는 아나운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병원 복도에 울려 퍼졌다.
다 끝이다. 모두 죽어 버리라지. 이렇게나 잔인한 세계라면 망해도 상관없다.
후기
ts아스신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하 eoe) 조합이라니 성한 곳이 하나도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글은 내가 쓴 2차창작 글 중 처음으로 러브신이 들어간 글이자 커플링을 전면에 내세운 글이다. 시작부터 이렇게 세게 나가도 되는지 모르겠다.
eoe 초반 아스카의 병실 장면은 신지가 아스카를 싫어하면서도 원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드러내지만, 하필 거기서 아스카가 신지의 성적 ‘상대’가 아니라 ‘대상’으로만 쓰인다는 점이 문제다. 그 장면을 본 사람 누구에게나 그 메시지가 정확하게 전달될 가능성도 낮다. 신지가 아스카를 별로 안 좋아했던 것도 맞고 그 당시 신지의 정신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도 맞지만, 병실 장면은 아스카와 여자 관객들을 모욕하고 공격하는 의미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이 장면을 보고 놀람과 불쾌함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솔직히 나도 병실 장면의 메시지 전달방법이 정말 마음에 안 든다. 그래도 진짜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아니까 차마 아주 싫다고는 못하겠다. 오타쿠의 숙명이다. 딱히 만화판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것이 병실 장면의 전개를 뒤틀어 과격함을 줄이면서도 본질을 살린 것은 좋았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만화판 전개에 원작에 가까운 캐릭터성을 적용하려 했다. 신지와 아스카가 소위 썸도 아니고 갑을관계도 아니며 무수한 애증이 섞인 복잡한 관계라는 걸 살리고 싶었다.
에반게리온은 20세기에 나온 작품이다. 성희롱이라는 개념이 알려진 지도 얼마 안 된 1990년대 일본 사회에서, 현실에 없는 캐릭터들을 마음껏 성적 대상으로 소비하던 남자(와 소수의 여자) 오타쿠 집단이 현재와 같은 수준의 성인지 감수성과 사회성을 발휘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작품 밖으로도 eoe 제작 당시 감독이 여성 캐릭터를 대상화할 의도로 성우들에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한 일은 악명이 높다. 그만큼 가이낙스가 후안무치하고 마초적인 집단이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지금도 으레 에반게리온 팬들을 공격하는 레퍼토리 중 하나가 작품 내외적으로 그렇게 구시대적(+여성혐오적)이고 반사회적인 작품을 왜 좋아하냐는 것이다. 팬들은 '그럼에도' 에반게리온은 타인과 소통하라는 시대를 초월하는 메시지를 말하고 있다고 반박하지만, 반대파들은 그걸 한번에 보고 알 수 없으니까 이것은 저질 창작물이며 이걸 좋아하는 너희들도 이상하다고 다시 비판한다. 최근에는 캐릭터 디자이너가 혐한·여성혐오 발언을 했음에도 여전히 떠나지 않는 팬들에게 그러고도 그 작품을 못 놓냐, 이래서 오타쿠들은 답이 없다는 비난이 더해졌다.
하지만 애착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구에게나, 어느 것에나 갖는 것이고, 절대로 완전무결한 감정일 수 없다. 모든 것에 객관적인 태도를 지니기란 어려운 일이다. 애착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초인이거나 아주 우울하고 공허한 이일 것이다. 좋아하는 감정과 행위가 나와 남의 삶을 뿌리부터 갉아먹지 않는다면, 설령 남들에게 공공연히 말하기 부끄러운 것들을 좋아할지라도 자신을 책망할 필요는 전혀 없다. 왜 그따위 것들을 좋아하느냐고 핏대를 세워 남을 공격할 이유도 당연히 없고. 어떤 것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것에 관심이 없든 자기가 마음 가는 대로 살면 된다. 영원히 되풀이될 논쟁으로 서로 상처만 줄 필요는 없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나 문제적인 인간들의 손에서 만들어진 신지와 아스카가 9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의 캐릭터치고 성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특성들을 많이 지녔다는 점이다. 소심하고 나약하지만 집념이 세고, 활발하고 공격적이지만 내면은 무르다. 이런 다이나믹한 캐릭터 조형과 관계가 팬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에반게리온이 마냥 여성혐오에 찌든 구시대의 유물로 남지 않게 하는 것 같다. 또, 바람직하고 건강한 감상법이 아닐지라도 팬들은 이런 요소들을 가지고 만약 이들이 고정관념에 맞게 여자/남자였다면 어떤 모습일지를 상상하게 된다. 굉장히 전형적이고 구시대적인 갑을관계가 되겠지만, 고집이 세고 강인하지 않은 이면의 모습들이 그대로 발현된다면 상당히 흥미진진한 사이가 될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에 만약을 가정하는 건 우스운 일이나, 사람들은 순전히 재미를 위해 수많은 만약‘들’을 상상하고 글과 이미지로 그려낸다. 이 글도 그런 의도에서 쓰였다.
아스카는 보통 여자 이름이고 한자로는 明日香라고 쓰지만, 飛鳥로 쓰면 남자 이름으로도 쓰여서 그대로 썼다. 그런데 신지는 아무리 찾아도 남자 이름(真嗣、慎二、信治 등)밖에 예시가 없어서 그냥 신(真 또는 心)으로 타협했다. 이런 점도 두 인물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흥미롭다.
마지막으로 에반게리온과 같은 해에 나온 <美貌の青空>라는 노래를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타는 듯한 세기말의 여름을 배경으로, ‘나’와 ‘너’는 사랑하는 사이임에도 괴로워한다. 개인적으로 노래를 들을 때마다 eoe의 신지와 아스카가 생각나서 가져와 보았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다른 인물들의 조합으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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