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이 단편은 구극/tv판이라 불리는 <신세기 에반게리온> (1995)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겐도가 유이를 만나기 전에 있었을 법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본편 내용에 영향을 주지 않는 오리지널 단역이 나옵니다. 험악한 분위기 주의.
박사과정을 막 시작한 사토가 책상을 정리하다가 1년 선배인 스즈키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 로쿠분기 선배님 말인데요. 키도 크고 항상 혼자 다니고, 눈은 번쩍번쩍해서 뭔가 영화 주인공 같지 않아요? 과묵하지만 세미나 때는 뼈 있는 말만 툭툭 던지고. 스즈키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야 사토, 대체 그놈이 어디가 멋있다는 거야? 확실히 머리랑 눈은 예리하지. 그치만 학자나 배우 같은 게 아니라, 뭐랄까……, 어쨌든 좋은 편은 아냐. 내 생각까지 꿰뚫어볼 것 같아서 기분 나빠. 난 처음 봤을 때부터 쎄했어. 그런 사람은, 외모는 험악해도 사실 착하고 부자였다! 이럴 때만 멋있는 거야. 로쿠분기는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이잖아. 외식은 꿈도 못 꾸고, 학식만 먹어도 언제나 돈이 부족한 서민이라고. 그런 놈은 잊어버리고, 나랑 친하게 지내자. 어때, 일단 학교 앞 카페에서 차부터 한 잔 할래?”
“무슨 속셈인지 다 보이거든, 스즈키? 그리고 네가 아직 말 안 한 게 있어. 잘 들어봐, 사토 씨. 그 사람 같은 눈빛을 가진 사람은 위험해. 남자는 더 위험해. 요주의인물이란 말야. 남을 첫인상으로 판단하는 건 좋지 않지만, 이건 나랑 다른 여자들의 경험과 직감으로서 꼭 알려 줘야겠어. 너 비참해져, 그런 남자한테 반하면. 저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나빠 보여도 사실 마음에 상처가 있어서 저렇게 된 걸 거야. 내가 돌봐주면 본래의 연약하고 선한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거야. 사랑의 힘이라는 말이 왜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지? 택도 없어. 그런 사람을 고칠 수 있는 건 전문가의 상담뿐이야. 괜히 손대 보려고 했다가 너만 다친다고. 미녀와 야수는 말 그대로 판타지야.
현실에서 그런 남자한테 뭣 모르고 접근했다가는 그놈이 너를 이용해 먹을걸. 얘가 나한테 반한 것 같으니 적당히 데리고 다니면서 감정 쓰레기통으로 삼아야지, 그러다 지치면 버려야지. 물론 자기가 이런 생각을 하는 줄 모르면서 그러는 놈들이 더 많다는 게 씁쓸하긴 해. 하지만 이걸 알고서도 계속 여자를 이용해먹는다? 그때는 정말 전투를 준비해야 해.”
직장에 다니면서 박사논문을 준비하는 다나카가 말했다.
“첫인상과 여자의 직감은 언제나 정답이구만. 그놈 아무하고나 싸우고 다니잖아? 여자랑은 말로, 남자랑은 주먹으로! 사토 씨는 그놈이 처음 본 학부생을 두들겨 팼던 건 알아? 모르겠지, 그거 로쿠분기가 석사 할 때 일이니까. 근본부터 나쁜 놈이야.”
다나카의 남자친구 다카하시가 옆에서 덧붙였다.
“로쿠분기를 놀린 그 남자애가 먼저 잘못했긴 했어. 돈도 못 벌면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교수의 노예를 자처하는 멍청이들, 졸업 후 진로는 머리랑 입만 살아서 스레드에서 키보드 싸움이나 하는 백수 히키코모리……. 다시 생각해 보니 화나네. 그래도 그거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건 정상이 아니지 않아? 고졸이라서 그 정도밖에 모른다 생각하고 넘어가면 될 걸 죽자고 덤벼들다니.
그것도 그건데, 아무리 시간이 부족하고 세속과 동떨어진 대학원생이라고 해도 상황에 맞는 차림이라는 걸 모르나, 그놈은? 옷도 머리도, 주인을 똑 닮아서 엉망진창이야. 수염도.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랩 마스코트네! 사토, 차라리 총장님이 멋있다고 하면 믿어 줄게.”
로쿠분기와 석사 동기였지만, 외부에서 일하다 와 박사과정을 늦게 시작한 와타나베도 끼어들었다. 사토의 편을 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너무하세요, 다들. 아무리 본인이 없는 장소라고 해도 이렇게 뒷담이나 하고. 비겁하시네요.”
사토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연구실 문이 열렸다. 그 앞에는 방금 전까지 화제였던 형이상생물학과의 마스코트, 또는 폭탄이라고도 불리는, 졸업논문이 이제야 통과된 로쿠분기 겐도가 서 있었다. 오랫동안 안고 있던 숙제가 해결되어서 기분이 좋아진 건지 웬일로 술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머리와 옷은 여전히 너저분하고 쿰쿰한 냄새가 났다. 그는 헛기침을 하면서 연구실 안을 둘러보았다.
“얘기하는 거 다 들었다. 내 이야기지? 뒤에서 이렇게 수군대서야 너희나 나나 다를 게 없잖아. 아까 소리친 애, 이름은 몰라도 아직 제정신인 것 같네. 이런 인간들이랑 같이 있으면 이상해져. 빨리 다른 사람하고 어울리는 게 좋을걸.”
새파란 남을 제정신이니 뭐니 마음대로 판단하는 그도 보통내기는 아니다. 두 눈은 무서울 정도로 흔들리지 않고 경멸 어린 시선을 쏘았다.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밀어내기 위한 눈빛이다. 목소리는 녹슨 칼날에 모래를 문지르는 것처럼 거칠었다. 장마가 지나간 뒤 끝없이 습한 열기만이 남은 7월 중순이었지만, 연구실의 공기는 한겨울처럼 얼어붙었다. 누구 한 마디 할 수 없게, 모두의 입술이 꼭 붙어버린 최악의 순간. 그 침묵을 깬 것은 화가 잔뜩 난 스즈키였다.
“허, 친구 한 명도 없는 새끼가 말만 잘 하네! 자기가 미움받는 걸 알고 있으면 조금이라도 고치려고 노력을 해 보란 말야. 이제 남자든 여자든 사랑받지 않고서는 살기 힘든 세상이라고. 연애도 결혼도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어?”
여기에 질 로쿠분기가 아니다. 오히려 스즈키가 그의 화를 더욱 돋우는 꼴이었다. 로쿠분기는 더욱 날선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맨날 친구들이랑 술 퍼마시고, 연애니 헌팅이니 하며 빈둥대면서 박사가 되겠다고 생각해대는 것들이랑 어울릴 바에, 외로워도 혼자 지내는 게 낫지 않겠냐? 초등학생이라도 그건 알고 있을 걸.”
어린이와 관련된 일을 하는 와타나베에게 그의 마지막 말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평소 이상으로 화가 난 그가 의자를 걷어차다시피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초등학생이라도 그런 걸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건 다 알아. 넌 지식만 쌓고 살았지 사회성이나 상식은 안 배운 것 같네. 좋은 머리, 앞뒤 안 가리는 말을 무기 삼아서 낡아빠진 어른들과 지금까지 잘 싸워 왔던 것 같은데, 성격이 모난 건 평범한 사회인으로서 절대 자랑거리가 아니야. 언제까지 반항심 가득 찬 사춘기 남자애처럼 빽빽대기나 할 거야? 32살이면 나를 포함해서 애아빠가 된 사람도 한둘이 아니야. 나이를 먹었으면 부끄러운 줄 알아.”
사회경험 덕분에 원생들 중 가장 어른스럽고, 로쿠분기와 과거 인연도 있어 두려울 게 없는 와타나베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있는 힘껏 되받아쳤다. 그러나 로쿠분기 겐도는 그저 지루하다는 표정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수백 번, 수천 번 들어서 귀에 진물이 난다는 듯이.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눈은 웃고 있지만 입은 웃지 않았다. 명백한 비웃음이다.
“너네가 내 부모야? 잔소리 좀 작작 해. 자기 인생이 제일 급한 놈들이 남 인생을 걱정할 틈이 있냐? 아니, 충고라고 소리를 꽥꽥 질러도 결국에는 다 자기만족을 위한 거잖아. 그건 위선이야, 자기가 배려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믿고 싶으니까 자기를 속이는 거라고! 나를 하나도 모르고 알려고도 안 하는 주제에 말만 청산유수지. 다른 사람을 더 생각해서 말하는 건 어때, 교수님의 의견을 일단 존중해, 연구 대상자에게 더 공감해 봐. 그렇게 자기가 멋지고 사랑스러우면 거울에 키스라도 하지 그래? 행복을 얻는 방법은 멀리 있지 않아.”
“야, 로쿠분기 겐도! 너 미쳤냐? 무슨 말을 그따위로 해?”
그의 마지막 말에 사토는 상당히 충격받은 듯 했다. 막연히 동경하고 있던 상대가 스스로 환상을 깨 버리는 광경에, 그는 놀람과 공포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세미나 때마다 날카로운 비판과 통찰을 던지던 연구생 로쿠분기 겐도는 없었다. 연구실 한복판에서 오만과 증오에 사로잡혀 동료들에게 험한 말을 쏘아붙이는 추한 인간 로쿠분기 겐도만 있을 뿐이었다. 첫사랑 상대였던 선배가 실은 수업시간에 잠만 자고 땡땡이를 일삼는 시원찮은 놈이었다는 중학교 때의 해프닝은 차라리 귀여웠다. 학부생 때 거쳐간 상대 중 일부도 낭비벽이나 바람 등으로 좋지 않은 결말을 맞았지만, 그때는 이미 헤어질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것일뿐더러,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서도 안 될 것이었다. 이별을 코앞에 둔 사람을 굳이 비난하고, 당사자도 다시 안 볼 얼굴이라고 생각해 과격하게 반응하는 이 상황은 대체 무슨 추태인가?
사토는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로쿠분기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키 차이로 로쿠분기가 사토를 깔보는 듯한 구도였지만, 그는 입술을 앙다물고 결의를 굳힌 뒤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까지는 숨길 수 없었지만, 눈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사실 저 말예요, 로쿠분기 선배님을 처음 봤을 때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눈빛도 범상치 않고, 아는 것도 많은 데다가 인생을 몇 번이고 산 것처럼 말에 깊이가 있고. 대낮부터 술에 취해서 남들이랑 싸운다는 소문도, 박사를 아직도 졸업하지 못했다면 화가 나고 슬퍼서 그러겠거니 했어요. 오랫동안 들인 노력이 보답받지 못하는 기분은 저도 잘 아니까요. 그래서 더 선배님한테 관심을 가지고 선배님을 알고 싶어했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이제 다 지겨워요. 후유츠키 교수님 말씀이 맞았네요. 로쿠분기 선배님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어요? 서른도 넘은 어른이 자기보다 어린 동기들 뒷담에 그렇게 과격하게 반응할 일이에요? 다른 분들은 정말로 선배님을 걱정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사람은 누구나 남이 어려운 걸 보면 공감해서 그 상황을 해결해 주고 싶어해요. 설령 그게 당신이 말한 것처럼 자기기만이라고 해도, 그 순간 그 사람은 진심이란 말이에요. 당신처럼 호의를 걷어차는 인간은 평생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거예요.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도 절대 안 나타날 걸요. 남을 대체 뭘로 보는 거예요? 평생 혼자 살아, 늙어 죽을 때까지! 지금도 당신이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아서 더 역겨워. 마조히스트도 아니고.”
이렇게 말하는 동안 그의 충혈된 눈에서는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잔뜩 흥분해서 울부짖으며 로쿠분기를 저주하는 그의 눈뿐만 아니라 온 얼굴이 벌갰다. 인격의 밑바닥을 스스로 드러낸 이상, 그를 좋아할 사람을 찾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실컷 욕을 들은 로쿠분기는 이런 취급에 익숙해져 있다는 듯 쓰게 웃었다.
“너희가 아무리 땍땍거려도 아무 소용 없어.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바꾸는 건 절대 불가능해. 될 리가 없지! 신이라도 만나지 않는 이상은……. 아니, 신 같은 건 없어. 있었다면 내가 이따위 꼴이 나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서 로쿠분기는 화를 실어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사토는 바닥에 주저앉아 훌쩍대고, 면전에서 모욕당한 와타나베는 애꿎은 문만 걷어찼다. 아무 말 없이 눈만 이글거리며 앉아 있던 다나카가 낮은 목소리로 툭 던졌다.
“저놈은 뭐가 되려고 저래?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몰라, 저런 쓰레기 신경 쓸 시간 없어. 학회 다음주잖아? 준비 안 하면 교수님한테 또 혼날걸.” 다카하시가 다나카를 다독였다.
“그러게, 학회가 벌써 코앞이네. 야, 얘들아, 각자 논문이랑 발제문 싹 점검하고 모르는 거 있으면 서로 물어봐! 빨리! 특히 스즈키 너, 저번에도 후유츠키 교수님한테 혼났으면서 또 마감날까지 미룰 거야? 로쿠분기처럼 연구생으로 남기 싫으면 지금부터라도 조심해. 참……, 옛날의 나는 무슨 용기로 라캉을 공부하겠다고 했을까?”
다나카는 연구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일부러 크게 손뼉을 치고 바쁘게 돌아다녔다. 분이 풀리지 않은 사토는 시뻘건 눈으로 천장만 째려보다가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졸업논문도 통과했다 하니 로쿠분기는 곧 캠퍼스에서 사라질 것이었다. 저런 인간이 사회로 나가서 어떻게 되든, 자기 저주대로 비참하게 살든 기적이 일어나서 나름 행복하게 살든 알 바 아니었다. 그가 말한 대로 당장 자기 삶이 더 급했다.
후기: 쓸 당시에는 tv판의 자세한 설정을 몰라서 겐도가 만학도나 만년 박사과정생으로 대학에 남아 있었겠거니 생각하고 적당히 썼는데 정확한 신분은 연구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 대학의 학부연구생과는 다른 제도로, 특히 대학원 연구생은 석사에서 박사로 진학할 때 전문분야를 바꾸거나 박사과정 수업연한을 넘긴 원생이 거치는/갖는 신분이라고 합니다(https://ja.wikipedia.org/wiki/%E7%A0%94%E7%A9%B6%E7%94%9F). 설정을 확실하게 하고 싶어 추가했습니다.
tv판 로쿠분기 겐도 설정화 참고: https://twitter.com/gml0605_ghkd/status/1440231247511318531?s=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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