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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글

겐도와 모브 (1)

10월 16일 트윗 중 겐모브겐 1번 상황과 3번 상황을 확장했습니다. 모든 등장인물의 성별은 자유롭게 상상해 주세요. 서사가 거의… 없습니다…

유이의 정략결혼 상대로 설정된 마호 타카시의 성씨는 일본어로 순풍에 단 돛을 뜻합니다. 신지네 가족이나 킬 로렌츠처럼 제레 중심인물이라면 왠지 함선에서 따온 이름을 쓸 것 같네요


1. 결혼의 사회학

 

  “이로써 신랑 로쿠분기 겐도 군과 신부 이카리 유이 양의 결혼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이치죠 나기사는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다. 맛있기로 유명한 이 호텔 예식장의 스테이크의 달콤한 향기도 느껴지지 않았고, 나이프로 얇게 썬 스테이크 조각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전 세계를 뒤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제레의 핵심 멤버, 이카리 가의 영애 유이가 저런 듣도 보도 못한 사내의 아내가 되다니? 듣도 보도 못한 건 문제도 아니다. 조용히 숨어 있던 명문가 당주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청첩장을 받았을 때부터 로쿠분기라는 특이한 성씨가 마음에 걸렸다. 자기 가문 전속 흥신소에 조사를 맡긴 결과, 아니나다를까 그는 변변찮은 집안 출신이었다. 심지어 유이보다 10살이나 많은 노총각이었다. 남들이 다 취업하고 결혼하여 부모가 되었을 나이에 박사과정 졸업연한이 훌쩍 넘어갔는데도 연구생 신분으로 학교에 남아 있고, 학교 사람들과 인근 상인들에 의하면 미움받는 법만 기막히게 잘 알아서 남들과 부딪치기만 하면 싸움을 벌인단다. 확실하지는 않았으나 간사이 어딘가의 폭력 조직과 연이 닿아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의 인상도 유복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세상의 근심 걱정을 모르고 자란 부잣집 자식들 특유의 부드러운 카리스마 대신, 가진 것 없이 자기 능력 하나만으로 만인과 투쟁을 거듭하면서 살아온 이의 가시 돋친 경계심과 불손하게 번쩍이는 눈빛은 사람을 불편하게 했다. 분명 난잡하게 여자를 사귀었을 테고, 그렇게 쌓은 경험으로 세 치 혀를 적당히 놀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유이를 유혹했겠지. 그놈에게 유이는 데릴사위가 대부분 그러하듯 신분 상승의 도구일 뿐이다. 진심으로 사랑하지도 않고, 설령 사랑하더라도 유이의 인격이 아닌 그가 가진 막대한 재산과 젊은 육체를 사랑하는 것일 테다.

 

   그에 비하면 유이는 고작 23살밖에 되지 않았다. 25살에 부잣집 도련님과 결혼한다고 해도,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젊음을 즐길 시간이 차고도 넘친다. 아름답고 온화하지만 왕 같은 위엄을 지녔고, 천재들이 날고 긴다는 교토대에서 교수 추천으로 물 흐르듯 대학원에 진학한 재원 아니던가? 그가 시바의 여왕이었다면 솔로몬이 그에게 탄복했을 것이요, 헤이안 시대에 태어났다면 후세에 이름을 날리는 문인 여관이 되었을 것이었다.

 

  궁궐 후원에 핀 탐스러운 작약꽃 같은 유이를 저런 놈팡이가 감히 제 집 마당에 옮겨 심었다는 사실을, 나기사는 오랜 소꿉친구이자 제레 동지로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유이가 아버지의 손을 놓고 겐도의 옆에 설 때부터 하객들의 박수를 받으며 그 남자가 수줍은 듯 유이에게 입을 맞출 때까지, 나기사는 속이 뒤틀려 참을 수 없었다. 인류보완계획의 원대한 뜻을 함께할 자는 저놈 같은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더욱 고귀한 자여야만 했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도 알 수 없는 이 사내가 과연 이카리 가의, 제레의 일원이 될 자격이 있는가?

 

  주위를 둘러보니 이 결혼에 찬성할 수 없는 사람은 나기사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신부 쪽 하객뿐 아니라 교토대에서 온 신랑 쪽 하객도 겐도가 유이와 결혼한 이 상황을 어이없어하는 것 같았다. 그의 어머니도 양팔에 힘을 잔뜩 준 채 나이프와 포크를 놀리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물을 한 모금 무겁게 삼킨 뒤 한탄하듯이 속삭였다.

 

  “말세로구나. 저따위 놈이 이카리 가의 사위가 되다니! 이카리 녀석, 아무리 제 딸이 귀여워도 그렇지 너무 무르다니까. 원래 결혼하기로 했던 마호(真帆) 가 아들놈하고는 어떻게 된 건지.”

  “글쎄, 타카시 그 애가 미국에 유학을 갔다가 웬 이상한 여자를 만나서 개종해 버렸대. 방학 때 집에 올 때마다 그런 예언은 다 구시대의 헛소리고 진짜 복음과 구원은 따로 있다며 협박에 협박을 했는데, 부모가 끝까지 버티니까 아예 연을 끊어 버렸다나 봐요.” 접시를 긁다시피 하던 어머니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식농사 한번 대차게 실패해 버렸군, 하고 나기사는 생각했다. 아직 성공인지 실패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카리 가도 왠지 불안했다. 인류보완계획의 핵심 열쇠가 될 유이가 겐도의 꾐에 넘어가 부모도 버리고 보완계획도 버린다면? 그렇게 우리가 이 행성에 잘못 터 잡은 죄인, 태어날 때부터 본디 악한 존재로 계속 살아가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언짢은 기분으로 식사를 해서인지 신축성 없는 정장이 유독 조여 왔다. 작년 사촌 결혼식 때보다 살이 빠졌다고 생각해서 재단사에게 맡겨 허리를 줄였더니 이 사달이 났다. 후식이라도 먹으면 기분이 좀 나아지겠지 싶어, 나기사는 억지로 쥐고 있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웨이터가 접시를 가져가기를 기다렸다. 멍하니 테이블보의 희미한 무늬를 바라보고 있을 때, 오른쪽 어깨 옆으로 장갑 낀 손과 가무잡잡한 맨손이 긴 라이터를 쥐고 불쑥 들어왔다.

 

  “안녕, 나기사! 이게 얼마 만이니? 총회 때 보고 못 본 지 한참 된 것 같다. 아저씨 아주머니도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유이예요. 먼 길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하십니까, 로쿠분기 겐도입니다. 저희 결혼식에 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반가운 목소리와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제 나이에 맞는 경쾌한 디자인의 연보랏빛 피로연 드레스로 갈아입은 그는 오늘의 주인공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옆에서 새까만 연미복을 입고 목각인형처럼 어색하게 서 있는 로쿠분기 겐도를 보는 순간, 나기사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저 남자가 유이랑 이제 한 집에서 먹고 살면서 자식까지 낳으시겠다? 하지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프로가 할 행동이 아니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여러 가면을 적당히 바꿔 쓸 줄 아는 법이다. 여기서는 동지의 결혼을 축하하는 결속력 있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나야말로 초대해 줘서 고마워, 이카리. 로쿠분기 씨라고 하셨죠? 멋있게 생기셨네요. 무인 상이라고 해야 하나, 야성적인 느낌이에요. 이카리를 잘 부탁드립니다. 행운을 빌게요.”

  저 남자도 눈치가 있다면 멋있게 생겼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는 않을 것이다. 상류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생김새라는 걸 돌려서 말했을 뿐이다. 아니나 다를까, 겐도는 자기 앞의 인간이 자기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원래 유이와 만나서는 안 되었을 바닥 인생 자식. 진흙탕에서 구르다 유이의 가없는 은혜로 결혼까지 이른 복에 겨운 놈. 이카리 가와 제레의 수치요 예언의 방해자! 그걸 야성적이라는 말로 포장하다니, 유한계급 특유의 가식에 겐도는 환멸이 났다. 하지만 그도 이 계급에 편입된 이상, 집단 내에서 통하는 상식과 예절을 지켜야 했다. 그는 유이와 결혼사진을 찍을 때도 보이지 않았던, 살면서 지은 것 중 가장 환한 미소를 짜내어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행복하게 살게요.”


3. 제 눈에 안경

 

  요즘 통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 구내식당 반찬도 잘만 나오는데 말이다. 총무부에 이카리 사령관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리면 심장뿐만 아니라 온 몸의 맥이 정신없이 뛰었다. 그 사람이 부장의 보고를 들으며 내 쪽을 슬쩍 볼 때마다 가슴 한켠이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저렸다. 심지어 지난주 토요일 밤에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사령관에게 일을 잘했다고 칭찬받는 꿈까지 꾸었다. 꿈에서 깨기 싫어 눈이 뜨이자마자 다시 눈을 꾹 감고 잠에 빠졌지만, 그 다음 이어진 꿈은 부장놈이 부서 전 직원을 본부에 가둬 야근시키면서 일주일 동안 교자만두만 먹이는 개꿈이었다. 부장은 팔을 직각으로 세운 채 물구나무를 서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유진이 빌려준 한국 영화 DVD를 너무 열심히 봤나 보다. 사령관의 얼굴은 불길하게 빛나는 모니터에서도, 식어버린 교자만두 속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10시간 넘게 자고도 하루 종일 피곤한 상태로 멍하니 있다가 황금 같은 주말을 모두 날려 버렸다.

 

  이 찜찜한 기분을 풀 길이 없어 전전긍긍하다, 큰맘 먹고 옆 자리 동기 유진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 유진은 당혹스러운 듯이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내 상태를 파악하고 입술을 앙다물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한참을 끅끅거리던 그가 눈물까지 흘렸는지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아, 미안해! 이렇게 순진한 사람 너무 오랜만에 봐서. 옛날 생각 나네. 왜, 학교 다닐 때 보면 멋진 선생님들 짝사랑하는 애들 꼭 있잖아. 지금 하루키 네가 딱 그렇다니까. 뭐 여긴 학교도 아니고 군대지만, 그래, 그럴 수 있지! 사령관님은 우리한테 딱 일만 시키고, 쓸데없는 회식도 안 하고, 자기가 모르는 일에 오지랖 부리지도 않잖아? 그분 정도면 좋은 상관이지.

그런데 너도 참……, 어쩌다가 사령관님한테 반하게 된 거야? 반할 만한 사람이라면 작전부에 카츠라기 대위님도 있고, 기술부에 아카기 박사님도 있고, 다른 부에도 멋진 분들 많은데. 솔직히 사령관님은 좀 무섭잖아. 작은 실수라도 하면 싸늘하게 질책하시고, 표정도 맨날 굳어 있으시고. 아드님이랑도 사이가 서먹하신 것 같던데.”

 

  유진의 말이 맞다. 이카리 사령관은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리지도 않았지만, 부하 직원들에게는 언제나 냉혹했다. 연수를 마치고 갓 들어온 신입 직원들도 가차없이 질타하고, 안 되는 일은 될 때까지 시켰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재작년에 유진과 함께 막 입사했을 때, 누가 숫자 하나를 잘못 쳐서 예산 결산이 통째로 꼬이고 말았다. 결국 총무부 회계팀은 연대책임을 지고 사람 얼굴이 숫자로 보일 때까지 야근을 거듭했다. 부장 말로는 총부서회의 때 사령관이 “당연히 신입들도 남겨. 여기가 무슨 일을 하는 데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라고 했을 때 소리 없는 살기를 느꼈단다. 그때 내가 실수를 저지른 게 누군지도 모르는 멍청한 신입이었기에 망정이지, 일에 조금이라도 익숙했다면 안 피우던 담배를 태우며 아무 득도 없는 신입과 상관 뒷담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초호기 실험사고 때 자기가 아내를 죽인 범인으로 몰린 일로 정신적 충격이 컸는지, 최고자의 권위를 차리기 위해서인지, 감정표현도 거의 없었다. 어쩌다 전략자위대와 합동훈련이라도 하면 보도사진에서 의례적인 웃음을 띠고 있는 자위대 사령관들과 달리, 그의 얼굴은 내일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유일한 혈육인데도 그는 아들과 떨어져 살았다. 이런 사람에게 내가 어쩌다가 반한 건지 혼란스러웠다. 중학교 때 젊고 잘생긴 교생 선생을 좋아하던 반 친구들을 혼자 우습게 여겼었는데, 그때 충족하지 못한 욕구가 때늦은 짝사랑으로 되살아나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내 취향이 권위적인 타입이기라도 한 건가?

 

  후자는 분명 아니다. 나는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허세를 부리며 학생들을 억압하는 선생과 아이들을 무시하는 어른들을 싫어했다. 사람은 자기 부모와 닮은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유쾌하고 다정한 분이시다. 그렇다면 전자다. 내 마음속 어딘가에 나보다 뛰어난 이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숨어 있다가 이런 상황에서 이런 상대를 향해 음침하게 새어나왔다는 것이다. 왜 내가 직장 상사, 그것도 하필이면 최고 책임자를 욕망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걸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2015년 6월 하순, 나와 유진은 방공호 안에서 네르프 본부를 향해 쳐들어왔다는 ‘사도’에 ‘에반게리온 초호기’가 맞서 싸워 이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키만큼 쌓인 서류뭉치를 받았다. 우리는 첫 전투를 피와 살점이 튀는 참혹한 현장 경험이 아닌, 두 개체의 행위로 인해 파괴된 제3신도쿄시의 시설 목록과 사상자 명단, 피해를 복구하고 배상하는 데 드는 비용이 줄줄이 적힌 표와 영수증으로 기억했다. 비전투원인 우리에게는 생명의 안전을 보장받을 권리와 사고를 수습할 의무가 있었지만, 진상에 다가갈 권리는 없었다.

 

  한 가지 소식이 더 들렸다. ‘초호기’ 파일럿을 맡은 이는 ‘0호기’와 마찬가지로 중학생이며, 심지어 사령관의 친아들이라는 것.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소년병을 쓰는 일이니 불법과 비윤리의 극치다. 하지만 세컨드 임팩트 이후로 지난 세기의 상식이 통하기나 했던가? 생태계부터 인간 사회까지, 멀쩡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살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고귀한 인간이라도 운이 나빠 죽고 착취당하는 시대다. 어린아이 하나쯤 병력으로 쓴다고 큰 소란은 나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카리 사령관은 3년 만에 만난 아들에게 부정(父情)을 손톱만큼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아무리 사도가 쳐들어오는 긴급상황이라고 해도 14살짜리 아들에게 “이 로봇을 움직일 수 있는 건 너뿐이야. 아빠는 너 믿어. 사랑한다!”라는 따뜻한 격려 한 마디 없이, 탈 거면 빨리 타고 안 탈 거면 돌아가라고만 했다니. 이런 비정한 사람을 멋모르고 좋아한 내가 우습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성이 본성을 이기지 못하는지, 사령관과 부사령관이 식당에 나타날 때마다 내 입매는 주책없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 순간만큼은 달콤한 주스에 빠진 듯 기분이 이상했고, 한편으로는 간부식당도 따로 없는 네르프가 원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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